요코하마와 당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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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iards in Yokohama

막 개항한 항구 도시, 틈새로 바람이 스며드는 목조 호텔.
그 방 하나에 당구대가 한 대 놓여 있었습니다.
일본인 글쓴이는 그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고,
이윽고 외국인 클럽에서 일하던 한 젊은이가 말없이 그 놀이를 익혀 갑니다.
요코하마는 당구가 일본 사람들의 손으로 건너간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남겨진 기록을 따라, 그 백육십 년을 안내합니다.

시작은 나가사키Dejima

이 나라에서 처음 공 소리가 울린 곳은 요코하마가 아니라, 서쪽 끝의 작은 섬이었습니다.

에도 시대, 나가사키(長崎) 데지마(出島)의 네덜란드 상관에는 이미 당구대가 있었습니다. 나가사키시는 당구가 일본에 들어온 때를 1790년대 말로 보고, 신기한 마음에 연습하던 쓰지(通詞, 통역관)들이 금세 상관원들을 이길 만큼 실력이 늘었다고 전합니다. 1820년(분세이 3년)에는 상관장 블롬호프(Jan Cock Blomhoff)가 이임하는 나가사키 부교(奉行)와 새로 부임한 부교를 데지마로 초대해, 당구를 치게 하며 대접했습니다.

한편 사전류와 일본빌리어드협회는 전래 시기를 ‘가에이·안세이 무렵(1850년대)’으로 보고 있습니다. 연대는 자료에 따라 반세기쯤 차이가 나지만, 어느 쪽이든 시작은 데지마입니다.

요코하마의 이야기는 그보다 조금 뒤, 항구가 열리던 때에 시작됩니다.

개항의 항구에 단 한 대1859–1866

요코하마 호텔1860년 2월 개업

1859년(안세이 6년) 요코하마가 개항하자, 외국의 상인과 뱃사람들이 잇달아 찾아왔습니다. 이듬해 1860년 2월, 네덜란드인 선장이던 후프나겔(C.J. Huffnagel)이 타고 온 배를 판 돈으로 ‘요코하마 호텔’을 엽니다.

개항지에 살았던 한 네덜란드인의 회상에 따르면, 후프나겔은 이 지방에 단 한 대뿐이던 당구대를 직접 사들였다고 합니다.

그해 가을, 프로이센(지금의 독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이 호텔에 두 달가량 묵은 슈피스(Gustav Spiess)는, 귀국 후 펴낸 여행기에 숙소의 모습을 적어 남겼습니다. 창문도 난로도 없는 방. 침대와 책상, 그리고 대나무 의자 두 개뿐. 11월의 차가운 비와 바람이 뼛속까지 스몄다고.

하지만 식당 맞은편에는 당구실이 있었고, 그 안에 배에서 내려오는 손님들을 위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 땅에 단 하나뿐인’ 당구대는 늘 붐볐고, 사람들은 1달러나 반 달러를 걸고 공을 쳤다고 슈피스는 쓰고 있습니다. 오락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던 항구 도시에서, 그 한 대는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의 밤을 지탱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 바는 일본 최초의 바라고도 합니다. 호텔은 몇 차례 주인이 바뀌었고, 1866년(게이오 2년)의 대화재로 불타 그 역사를 마쳤습니다.

보고, 놀란 사람들분큐 연간(1861–1864)

같은 무렵, 일본 사람들도 이 신기한 놀이를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요코하마시가 쇼와 초기에 엮은 《横浜市史稿》(요코하마 시사고)는 개항 직후 요코하마의 견문기 《横浜奇談》(요코하마 기담)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외국인이 운영하는 숙소에 다다미 50장쯤 되는 큰 방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 길이 3간(약 5.4미터), 폭 2간쯤 되는 책상 같은 것이 놓여 있다. 가장자리는 2치(寸)쯤 높고, 모서리에는 구멍이 있다. 상대와 번갈아 막대로 공을 쳐서, 구멍에 들어가면 이기는 모양이다――.

글쓴이는 그 솜씨가 훌륭한 것을 보고 ‘참으로 놀랄 만하다’고 적었고, 일본 아이들의 놀이 ‘아나이치(穴一, 구멍에 동전이나 구슬을 넣는 놀이)’와 닮았다고 덧붙였습니다. 처음 보는 것을, 자신이 아는 말로 받아들이려 한 것입니다. 그 붓끝에는 개항의 거리에 섰던 사람의 놀라움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개항 직후의 요코하마를 그린 《横浜開港見聞誌》(요코하마 개항 견문지, 고운테이 사다히데(五雲亭貞秀) 그림)에도, 거류지의 외국인들이 당구대를 둘러싸고 막대로 공을 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 그림 보기: 《横浜開港見聞誌》 원본은 요코하마시 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국서 데이터베이스(国書データベース)에서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아래 출처에 링크가 있습니다).

거류지의 클럽에서, 일본인의 손으로Meiji

클럽의 보이메이지 초기

그렇다면 일본 사람이 직접 공을 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

쇼와 3년(1928년)에 도쿄의 당구보급회(撞球普及会)가 펴낸 《撞球場日記》(당구장 일기)는 그 시작을 요코하마에 두고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 뒤 요코하마 거류지의 영국인 클럽에 당구대가 놓였고, 놀러 오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크게 성행했다. 그 클럽에서 보이로 일하던 후쿠다(福田榮治郎)라는 사람이 어느새 이 놀이를 익혔고, 나가사키에서 이미 배워 두었던 ‘쓰루(鶴公)’라 불리는 사람과 둘이서 일본 사람들에게 퍼뜨렸다. 그것이 ‘당구가 행해지게 된 시초’라는 것입니다.

클럽의 이름도, 연도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쇼와 시대에 들어와 남긴, 전해 들은 이야기를 포함한 기록입니다. 그래도 손님들이 치는 공을 밤마다 곁에서 지켜보던 젊은이가 그 기술을 제 것으로 만들어 가는 모습은, 항구 도시에서 이국의 문화가 사람에서 사람으로 건너간 길을 잘 말해 줍니다.

도쿄로 건너간 당구대와 도구메이지 초기~메이지 20년대

같은 《撞球場日記》는 도쿄 초창기의 당구장에 관해서도 적고 있습니다. 구단(九段)에 당구대를 들인 사람은 그 대를 요코하마의 외국인에게서 사들였고, 메이지 10년대에는 도쿄의 당구 도구가 요코하마 거류지의 상관에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전해졌다고 합니다. 나가사키에서 당구를 익힌 쓰루는 이윽고 도쿄 간다(神田)에 당구장을 열었습니다.

바다를 건너온 당구대와 도구는 요코하마 항구에서 뭍에 올랐고, 거기서 도쿄로, 일본 곳곳으로 옮겨져 갔습니다.

호텔의 당구실, 거리의 유기장메이지 10년대~메이지 말

1873년(메이지 6년), 가이간도리(海岸通り)에 그랜드 호텔이 문을 엽니다. 1891년에 나온 영문 여행 안내서에 실린 이 호텔의 광고는 ‘천장이 높고 널찍한’ 독서실과 당구실을, 손님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구는 일본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도 뿌리를 내려 갔습니다. 가나가와현은 1879년(메이지 12년), 당구를 큰활·작은활(楊弓)·사격 놀이 등과 나란히 ‘여러 유기장(諸遊技場)’으로 분류해 세금을 매겼고, 1887년의 유기장 단속 규칙에서도 당구를 유기장 영업의 하나로 꼽고 있습니다.

1903년(메이지 36년)의 《横浜繁昌記》(요코하마 번창기)는 당구·공 굴리기·후키야(吹矢, 입으로 불어 쏘는 화살)·사격 놀이 같은 유기장이 이세자키초(伊勢佐木町) 일대에 처마를 잇대고 늘어서, 시내에 모두 120~130곳이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연극 극장과 요세(寄席, 만담 공연장)의 북적임 곁에서, 공이 부딪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겠지요.

사교의 장으로Taisho – Early Showa

1917년(다이쇼 6년), 개항 50주년을 기념해 지은 개항기념 요코하마 회관이 혼초(本町)에 문을 열었습니다. 공회당 외에도 도서실, 귀빈실, 사교실, 식당, 주점 등이 있었고, 그 가운데 당구실도 있었습니다. 요코하마의 정계·재계와 문화계 사람들이 모이던 건물로, 당구는 신사의 교양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회관은 간토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뒤 복구되어, 지금도 ‘요코하마시 개항기념회관’이라는 이름으로 시계탑 ‘잭의 탑’과 함께 혼초도리에 서 있습니다.

쇼와 초기, 사쿠라기초역(桜木町駅)에서 바샤미치(馬車道)를 지나 일터로 향하던 사람들의 길목에는 당구장 같은 곳도 있었다고 《中区史》(나카구사, 중구의 역사)는 적고 있습니다. 쇼와 10년(1935년) 전후 간나이(関内)의 주요 건물 목록에는, 바샤미치 입구 언저리에 ‘新生舎ビリヤード’라는 이름이 은행과 상점들 사이에 나란히 올라 있습니다.

전쟁, 그리고 ‘일종의 스포츠’1940s–1955

전쟁은 당구에게서도 많은 것을 앗아 갔습니다. 일본빌리어드협회의 연표는 1943년부터 46년까지를 ‘전쟁, 패전이 이어져 당구계 궤멸하다’라는 한 줄로 적고 있습니다.

그래도 전쟁이 끝나 가던 쇼와 19년에서 20년 무렵, 이세자키초 뒤편 하고로모초(羽衣町)의 이쓰쿠시마 신사(厳島神社) 근처에는 당구장과 밀크홀이 있었다고 《中区史》는 적어 두었습니다. 그 직후인 1945년 5월 29일의 공습으로, 간가이(関外)의 거리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후, 1948년의 풍속영업단속법(風俗営業取締法)에 따라 당구장은 마작장, 파친코 가게와 함께 ‘풍속영업’으로 분류되게 됩니다. 이를 바꾼 것이 1955년(쇼와 30년)의 법 개정이었습니다. 참의원 본회의에서 위원장은 개정 이유를 ‘원래 당구의 본질은 일종의 스포츠로서, 결코 우연에 승부를 거는 것이 아니며’라고 설명했습니다. 같은 해 7월 20일에 공포된 이 법률로, 당구장은 풍속영업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개항의 항구에서 내기 승부로 시작된 놀이가, 백 년에 걸쳐 기술을 겨루는 스포츠로 인정받은 날이었습니다.

붐이 지나간 뒤1980s – Today

1985년에 간행된 《中区史》는 이세자키초의 뒷골목 와카바초(若葉町)를 ‘볼링장과 당구장도 많은’ 거리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듬해인 1986년 12월, 영화 〈컬러 오브 머니〉(일본 개봉 제목 〈허슬러 2〉)가 일본에서 개봉되면서 전국에 당구 붐이 일었습니다. 일본프로포켓빌리어드연맹(JPBA)의 연표는 1988년에 대해 ‘캐롬 전성기의 간토에서 포켓이 뿌리내리기 시작하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캐롬이 주류였던 요코하마에도 포켓 당구대가 늘어 갔습니다.

붐의 열기는 이윽고 가라앉습니다. 2019년에는 고호쿠구(港北区) 히요시(日吉)에서, 70년 안팎에 걸쳐 학생들과 동네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온 두 가게가 잇따라 막을 내렸습니다. 그중 한 곳은 붐이 일던 시절 밤늦게까지 줄이 늘어섰다고 보도된 가게입니다.

실행위원회에서

도전하는 것은, 당구의 미래. 창조하는 것은, 요코하마의 레거시.

개항의 항구에 놓인 한 대에서, 백육십여 년. 요코하마의 당구는 호텔의 당구실, 클럽, 동네 유기장, 신사들의 사교실, 그리고 붐이 일던 밤의 가게로 모습을 바꾸어 가며 이어져 왔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가게 하나하나에, 공을 치던 사람들의 시간이 있습니다.

Yokohama Open은 그 시간의 끝에 새로운 한 페이지를 더하고 싶습니다. 거리를 걸으셨다면, 가까운 당구장에서 꼭 한 번 공을 쳐 보시기 바랍니다.

걸으며 따라가기Walk

  • 야마시타초(山下町, 옛 거류지): 요코하마 호텔과 그랜드 호텔, 외국인 클럽이 있던 일대. 지금은 야마시타 공원과, 그 앞 거리를 따라 이어진 거리 풍경입니다.
  • 요코하마시 개항기념회관 (나카구 혼초 1초메): 한때 당구실이 있던 회관. 일본의 국가 중요문화재입니다. 공개일과 시간은 요코하마시의 안내에서 확인해 주십시오.
  • 바샤미치·이세자키초: 메이지 시대의 유기장, 쇼와 시대 출근길의 당구장이 있던 거리. 이세자키초에는 지금도 당구장이 있습니다.

출처

이 페이지는 당시의 여행기, 시사(市史), 업계의 기록, 국회 회의록 등 출처를 확인할 수 있었던 자료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연도와 숫자는 출처 시점의 것입니다. 자료에 따라 연도나 수가 다른 경우에는 본문에 그 사실을 밝혔습니다. ‘일본 최초’라고 일컬어지더라도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라고 한다’는 식으로 적었습니다. 옛 자료에서 인용한 부분은 우리말로 옮겼습니다(일본어판에서는 옛 표기를 그대로 두거나 읽기 쉽게 고쳐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