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는, 112쪽에 끼워진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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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 안에서, 가방 바닥에 있던 문고본을 발견했다.

책갈피가, 112쪽에 끼워져 있다.

언제부터 읽지 않았던 걸까.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던 것 같다.

펼쳐 본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한 사람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였는지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책갈피를 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왜일까.


책갈피의, 무게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 된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112쪽이,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회사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

임시 저장한 채로 둔 메일.
중간에 닫아 버린 기획서 파일.
‘나중에 할 것’이라고 써서, 그대로 붙어 있는 포스트잇.

내용은,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문득문득 기척만이 돌아온다.

끝난 일은, 깨끗이 잊혀 간다.
끝나지 않은 일만이, 등 언저리에 남는다.


백 년 전의, 찻집

1920년대의 베를린.
어느 심리학자가, 찻집의 웨이터를 지켜보았다고 전해진다.

웨이터는, 아직 계산이 끝나지 않은 주문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계산이 끝나면, 그 주문은 곧바로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거기서, 하나의 가설이 태어났다.
사람은, 하다 만 일일수록 잘 기억한다.

연구자의 이름을 따서,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불리게 된다.

2025년, 백 년 가까이 이어진 연구를 다시 정리한 메타분석이 발표되었다.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사람은, 하다 만 일을 반드시 잘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중단된 일로 돌아가려는 경향은, 남아 있었다.

기억하고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잊고 있어도, 손은 뻗는다

기억의 문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두면, 하다 만 목표가 불러오는 잡념이 줄어든다, 는 보고도 있다.
책갈피도, 아마 작은 계획이다.
여기서부터는, 다음에.

내던진 것은 아니다.
뒷부분을, 어딘가에 두고 왔을 뿐.


폐점의, 음악

그 주 금요일, 퇴근길에 동료가 말했다.

“잠깐만 치고 갈래?”

간나이의 상가 건물 3층.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와, 테이블 위만 비추는 불빛.

큐를 쥐었다.
안 들어간다.
또 안 들어간다.
그래도, 동료는 웃고 있다.

몇 번 치다 보니, 공이 조금씩 생각한 쪽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가게 안에, 폐점 음악이 흐른다.

테이블에는, 아직 공 세 개가 남아 있었다.

수구의 위치.
노릴 수 있을 것 같은 하나.
그 안쪽에, 숨어 있는 하나.

“나머지는, 다음에 하자”

큐를 케이스에 넣고, 계단을 내려왔다.


112쪽으로, 돌아간다

이튿날 아침, 그 배치를 떠올려 보려 했다.

공 세 개가, 어디에 있었는지.
솔직히, 벌써 흐릿해졌다.

그래도, 그 마지막 한 개를 쳐 보고 싶다, 는 마음만은 남아 있었다.

가방에서 문고본을 꺼낸다.
이름을 잊어버린 등장인물들을, 다시 만나러 간다.

아마, 그 테이블에도, 또 갈 것이다.
공 세 개는, 이제 거기 없겠지만.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돌아가고 싶어진다.

1쪽을 펼친다.

책갈피는, 112쪽에 끼워진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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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 Ghibellini, R. & Meier, B. (2025). Interruption, recall and resumption: a meta-analysis of the Zeigarnik and Ovsiankina effects.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Communications, 12, 962. doi:10.1057/s41599-025-05000-w
  • Masicampo, E. J. & Baumeister, R. F. (2011). Consider it done! Plan making can eliminate the cognitive effects of unfulfilled goal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01(4), 667-683. doi:10.1037/a0024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