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쿠고와 당구는, 닮았다.——일본적 미의식에 관한 이야기.

落語とビリヤードは、似ている。——日本的な美意識の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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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쓰기라는 기법이 있습니다.

깨진 도자기 조각을 금이나 은으로 이어 붙이는, 일본의 전통적인 수리 기법입니다.

완벽하게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깨진 자국을 그대로 남기고, 오히려 그것을 금으로 돋보이게 한다.
완성된 그릇에는, 새것이던 시절의 기억과, 깨져 버린 일과, 지금 이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모든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그릇의 겉면뿐입니다.
하지만 거기 보이지 않는 것에 마음을 기울일 때——그 그릇은 더 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니게 됩니다.

여백이란, 보이지 않는 부분에까지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 공간을 말합니다.

일본인이 오랜 시간에 걸쳐 길러 온 미의식이 있습니다.
만개한 벚꽃보다, 지는 꽃잎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성.
완벽한 도자기보다, 긴쓰기로 이은 그릇에서 와비(侘)를 느끼는 눈길.
그리고, 말해지지 않은 말 속에서 깊이를 느끼는 마음.

그 미의식을 가장 잘 담아낸 예능 가운데 하나가, 라쿠고(落語)입니다.

라쿠고라는 예능의 본질

라쿠고는, 한 사람의 연자가 모든 등장인물을 연기합니다.

부채와 수건 한 장만을 도구 삼아, 에도의 뒷골목 나가야도, 요시와라도, 지옥마저도 불러낸다.
관객은 아무것도 없는 고자(高座)를 바라보며, 거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본다.

다테카와 단시는 이것을 ‘일루전’이라 불렀습니다.

단시가 말하는 일루전이란, 무대 장치나 환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있는 부조리를 말합니다.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 모순된 욕망, 어찌할 수 없는 업(業)——그것이 고자 위에서 생생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단시는 또 하나의 말을 남겼습니다.

“라쿠고는 인간의 업의 긍정이다”

못난 인간이, 어찌할 도리 없는 처지에서, 그래도 살아간다.
그 우스움과 서글픔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긍정한다. 그것이 라쿠고라고.

업의 긍정이란, 곧 불완전의 아름다움입니다.
인간의 약함을 인정하고,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습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그리고 고전 라쿠고의 재미는, 같은 연목이라도 연자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는 데 있습니다.

시바하마도, 다이쿠시라베도, 소코쓰나가야도——백 년 전부터 이어져 온 같은 이야기가, 연자의 해석과 개성에 따라 전혀 다른 표정을 띤다.
그 ‘차이’ 속에, 연자의 인생이 배어 나옵니다.

다이쿠시라베의 일갈

고전 라쿠고에 ‘다이쿠시라베’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집세가 밀린 목수 요타로의 연장통을, 집주인이 거둬 가 버린다.
우두머리 목수 마사고로가 집주인에게 담판을 지으러 가지만, 집주인은 돌려주지 않는다.
서로 옳은 말을 쥐고, 서로 물러서지 않는다.

이윽고 일갈과 일갈이 오가게 됩니다.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쪽도 물러서지 않는다.
오기와 자존심과 감정이 뒤엉켜, 옳은 말만으로는 풀리지 않는다——그것이 인간의 업입니다.

당구 시합에서, 교대 브레이크 속에 서로가 런아웃을 거듭 쳐내는 장면을 떠올려 보세요.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공 하나하나가, 상대에게 던지는 물음이 된다.
상대의 한 구가, 이쪽을 향한 일갈이 된다.
가진 힘을 다 쏟아, 테이블 위에서 말 없는 응수가 이어진다.

말 없는 다이쿠시라베가, 테이블 위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인볼의 브레이크는, 연구가 거듭되어 컨트롤 브레이크로 어느 정도 비슷한 배치를 재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재미없어졌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브레이크라도, 선수에 따라 그 뒤의 구성이 전혀 다르다.
한 구 한 구의 선택에, 그 선수의 생각과 개성과 인생이 배어 나온다.
고전 라쿠고와 마찬가지로, 같은 ‘연목’이라도 연자에 따라 표정이 바뀌는 것입니다.

사람은, 강하지 않다

여기서 솔직히 말해야겠습니다.

사람은 강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연습을 쌓아도, 아무리 준비를 해도, 본인의 노력과는 다른 곳에서 실수는 일어납니다.
완벽을 목표로 하면서도, 완벽에는 닿지 못한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시합 막바지, 여기다 싶은 장면에서 손이 떨린다.
들어가야 할 샷이 빠진다.
마음과는 반대로,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런 순간을, 당신은 겪어 본 적이 있을까요.

진 뒤에 ‘공이 안 따라 줬다’ ‘플루크에 당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느껴 버린다——그것은 꼴사나운 일일까요.

이기고 싶으니까, 그렇게 느낀다. 인간이니까, 그렇게 느낀다.

그리고 그 부조리 속에서, 선수는 계속 공을 칩니다.

실수 뒤에 내놓는 리커버리 샷.
완벽하지 않았던 한 구에서, 곧바로 다음 최선을 다시 짜 맞춘다——그 즉흥의 아름다움은, 긴쓰기를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깨진 그릇을 금으로 잇듯, 실수라는 상처 자국을 다음 한 구로 이어 간다.
그 이음매에야말로, 그 선수의 인간으로서의 깊이가 깃들어 있습니다.

라쿠고가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을 긍정하듯, 당구는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 속에서 계속 공을 치는 인간을 긍정하고 있다.

듣는 이의 상상력으로 완성된다

라쿠고는, 연자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고자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관객의 상상력이, 나가야를 불러내고, 인물에게 숨을 불어넣고, 이야기를 움직인다.
라쿠고는 듣는 이의 상상력이 더해져 비로소 완성됩니다.

당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공 하나가 구른 뒤, 보는 사람은 저마다의 해석을 품는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저건 플루크일까, 계산일까’——그 물음이 생겨나는 순간, 당구는 보는 이의 안에서 완성됩니다.

정답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받아들이는 방식은, 보는 이의 것입니다.

👉 당구는, 예술이다.——물음을 던지는 공 하나의 이야기.

여백 속에, 모든 것이 있다.

여백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불완전함 속에서 맛을 느낀다.
인간의 업을 긍정한다.

라쿠고가 그 미의식을 체현한 예능이듯, 당구 또한 같은 것을 품고 있습니다.

샷 직전의 고요 속에, 마(間)가 있다.
완벽하게는 재현할 수 없는 한 구 속에, 불완전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래도 계속 친다는 것 속에, 업의 긍정이 있다.

라쿠고를 본 적이 있는 분도, 없는 분도.
당구를 쳐 본 적이 있는 분도, 없는 분도.

한 번, 그 고요 속에 몸을 두어 보세요.

거기서 무엇을 느낄지는——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 일본과 해외의 당구 정보를 목적별로 정리했습니다: 당구, 그 깊이를 향하여 (새 소식은 매시간 업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