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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정면에서 본 얼굴과 옆에서 본 얼굴을, 한 장의 그림에 그렸다.
그때까지의 회화는, 하나의 시점에서 세계를 잘라 내고 있었다.
피카소는 그 규칙을 부수었다.
동시에 존재할 리 없는 여러 시점을, 하나의 캔버스에 겹쳤다.
그것이 큐비즘이었다.
부수고, 다시 짜 맞춘다
큐비즘은, 대상을 기하학적인 조각으로 분해하고, 다시 구성한다.
기타는 줄과 몸통과 넥으로 나뉘어, 각도가 다른 면으로 재배열된다.
인물은, 정면의 눈과 옆얼굴의 코가 같은 얼굴 안에 공존한다.
부서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부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시점으로는 보이지 않던 것을, 여러 시점에서 동시에 보려 하고 있다.
보는 쪽에게는 혼란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그리는 쪽에게는, 그것이 가장 리얼했다.
당구도, 조금은 닮았다.
테이블 위에도, 그것이 있다
당구 테이블을, 위에서 내려다본다.
공이 테이블 가득 흩어져 있다.
하나의 배치.
하나의 순간.
하지만, 그 순간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가 몇 겹이나 포개져 있다.
공 하나를 친 뒤의 배치.
그다음의 배치.
클러스터를 무너뜨린 뒤의 배치.
랙을 깬 뒤의 배치.
선수는, 그 미래를 지금 보고 있다.
시점의 다각성
선수가 테이블 주위를 걷고 있다.
그것은, 산책이 아니다.
같은 배치를,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다.
정면에서 보는 라인과, 옆에서 보는 라인은 다르다.
두께가 달라진다.
쿠션과의 거리감이 달라진다.
같은 배치인데도, 다음 공 하나의 풍경까지 달라진다.
하나의 테이블인데도, 서는 자리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이 보인다.
피카소가 정면과 옆얼굴을 한 장에 겹쳤듯, 선수는 여러 시점을 머릿속에서 겹치고 있다.
그리고, 그 전부를 품은 공 하나를 친다.
기하학으로의 분해
당구의 사고는, 테이블 위의 현실을 분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공과 공 사이의 거리.
포켓까지의 각도.
쿠션에서 튕겨 나오는 반사각.
수구에 거는 스핀이 그리는 곡선.
복잡해 보이는 배치가, 하나씩 기하학적인 요소로 분해되어 간다.
선과 각도와 곡선.
큐비즘이 대상을 기하학적인 조각으로 분해했듯, 선수는 테이블 위의 현실을 기하학으로 분해하고, 머릿속에서 다시 구성한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구성된 상을, 큐라는 도구로, 공 하나로 바꾸어 낸다.
영상의 큐비즘
기타노 다케시는, 2005년에 기묘한 영화를 찍었다.
“TAKESHIS’”.
영화감독으로서의 비트 다케시.
배우로서의 비트 다케시.
코미디언으로서의 비트 다케시.
그 전부가, 한 편의 영화 안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꿈인지 현실인지, 어느 쪽 ‘다케시’가 진짜인지, 경계가 녹아내린다.
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로 보인다.
그것은 아마, 영상의 큐비즘이었다.
한 사람 안에 있는 여러 얼굴을, 동시에 하나의 작품에 겹쳤다.
정면과 옆얼굴을 같은 캔버스에 그린 피카소와 같은 일을, 기타노 다케시는 필름 위에서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구 선수도, 같은 일을 테이블 위에서 하고 있다.
사고 속의 큐비즘
선수가 초크를 칠하고 있다.
그 몇 초 사이에, 머릿속에서는 테이블이 몇 번이고 다시 구성되고 있다.
이 공을, 이 각도로, 이 힘으로 치면.
수구는 여기로 간다.
다음은 저 공을, 저 각도로.
그 너머에, 클러스터가 있다.
무너뜨린다면, 여기밖에 없다.
아직 공 하나도 치지 않았는데, 머릿속에서는 몇 구 앞까지 나아가 있다.
현재와 미래가, 하나의 사고 안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사고 속의 큐비즘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큐가 나간다.
공 하나가 구른다.
공 하나에는, 여러 시점이 겹쳐 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까지 겹쳐 있다.
선수가 치고 있는 것은, 하나의 공이 아니다.
테이블 위에 한 장의 큐비즘을 그리고 있다.





